거리에 완연한 봄기운이 내려앉았다. 따뜻해진 날씨를 즐기기 위해 태화강 국가정원 둔치를 걷거나, 선암호수공원 산책로를 한 바퀴 돌거나, 울산대공원 느티나무길을 거니는 시민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답답한 실내를 벗어나 도심에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쾌적한 보행 공간이 생활권 안에 있다는 것은 도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걷기는 개인의 건강 증진은 물론, 탄소 배출을 줄이고 지역 커뮤니티에 활기를 불어넣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필수적인 일상 활동이다.
보행권이란 시민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선진국에서는 이를 도시계획의 핵심 가치로 삼아 차량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도시 공간을 재편해 왔다. 도보권 안에서 일상적인 서비스를 모두 이용할 수 있도록 도시를 계획하는 이른바 ‘15분 도시’ 개념도 보행권의 연장선에 있다. 걷기 편한 환경은 단순한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고령자와 어린이, 장애인 등 이동 취약계층이 지역사회 안에서 독립적인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자, 지역 상권을 활성화하는 요인이며, 이웃과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토대이기도 하다. 보행 친화적인 거리일수록 유동인구가 늘고 지역 소상공인의 매출이 오르며, 주민 간의 우연한 만남이 잦아져 공동체 의식도 회복된다는 것은 여러 도시의 사례에서 확인된 바 있다.
울산에도 이런 걷기의 풍경이 하나둘 쌓여가고 있다. 태화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는 도심 한가운데서 강과 나무, 계절의 변화를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선암호수공원과 울산대공원의 순환 산책로는 매일 찾아도 좋은 근린(近隣) 보행 공간으로 자리 잡았고, 십리대숲길은 도보만으로도 자연과 역사와 문화를 잇는 울산의 고유한 길이 되었다.
생활권 단위에서도 남구 왕생로 일원에는 교통정온화 기법과 범죄예방환경설계(CPTED)를 접목한 개선사업이 추진 중이고, 중구 병영막창거리 일원에는 인도가 새로 조성되며 야간 보행 안전을 위한 환경설계가 적용되었다. 중구 원도심 시계탑사거리 일대에서는 보도 공간이 확대되면서 문화의 거리에서 태화강변까지 이어지는 보행축이 점차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어린이 통학로를 정비하는 작업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걷기 좋은 도시란 한두 개의 거창한 사업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좁은 보도를 조금 넓히는 일, 단차(段差)를 낮추는 일, 미끄럼 방지 포장을 까는 일, 가로등 하나를 더 세우는 일. 언뜻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이런 작업들이 쌓일 때 비로소 한 도시의 보행환경은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 잡는다. 화려하지 않지만 꼭 필요한 일들이 오래 이어진다는 것, 그 자체가 도시가 성숙해 가는 모습일 것이다.
걷는 길이 이어질 때 도시의 감각은 또 한 번 달라진다. 한 구간만 정비된 길은 산책이 되기 어렵다. 집 앞에서 시작해 공원과 상가, 학교와 정류장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경로 전체가 안전하고 쾌적할 때, 걷기는 비로소 특별한 나들이가 아닌 매일의 일상이 된다. 그래서 걷기 좋은 도시는 한두 해에 완성되지 않는다. 큰 사업 하나보다 작은 구간들이 오래 이어지는 끈기가 더 중요한 이유다.
따뜻한 봄날, 벚꽃이 흩날리는 태화강변이나 느티나무가 길게 그늘을 드리운 대공원을 걷다 보면, 도시의 품격은 높은 건물이나 화려한 경관이 아니라 이런 조용한 시간 속에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안심하고 학교로 향하고, 어르신들이 무리 없이 이웃집까지 걸어가며, 청년들이 골목을 산책하듯 돌아다닐 수 있는 도시. 세대가 함께 걸을 수 있는 도시야말로 우리가 오래 살고 싶은 도시일 것이다.
이 봄, 집 가까운 길 한 구간을 천천히 걸어보시길 권한다. 익숙하던 동네가 조금 다르게 보이는 작은 발견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다시 사랑하게 되는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이주영 울산연구원 도시공간연구실 연구위원